
[삼국지 디비기] (2)역사와 맞물려 있는 중국의 <삼국연의>
2010. 07. 14. 수요일
아홉친구
삼국지 디비기 1편 : 현재 우리가 가진 <삼국지>의 의미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가보자. 우리의 <삼국지> 인식에 일본의 영향이 상당히 컸음을 인지했다면, 본토의 경향을 전할 차례.
<삼국연의>가 어떻게 하여 생겨났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렇게 생각할는지 모르겠다. 진(晋)나라 때에 진수(陳壽)의 <삼국지>가 쓰여졌으니, 아마도 이를 바탕으로 야사(野史)를 동원하여 살을 붙이고 구전되다가 원나라의 희곡, 나관중이 총합한 소설의 형태로 굳어졌을 것이라고. 그러나 <삼국연의>의 시작이 정사 <삼국지>보다 늦었다고 말하긴 좀 어렵다.
제갈량의 공성계(空城計)를 다들 아실 것이다. 마속(馬謖)이 가정(街亭)을 잃은 후 양평(陽平)에서 뒷수습에 열중이던 제갈량은, 사마의(司馬懿)의 대군을 맞닥뜨리게 되자 오히려 성문을 모두 열어 젖히고는 태연히 높은 누각에서 거문고를 탔고, 사마의는 이것이 제갈량의 위계일까 두려워 진격을 멈추었던 일이다. 원나라 때의 희곡에서는 제갈량의 북벌 과정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유명한 부분을 실공참(失空斬)이라 하는데, 이는 실가정(失街亭), 공성계(空城計), 참마속(斬馬謖)을 가리킨다. 원대의 희곡은 이후 경극(京劇)으로 상연되었고, 실공참 중에서도 흔히 ‘공성계’ 부분만 상연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공성계는 제갈량의 계략을 대표하는 사건으로 오래 전해져 왔다.

물론, 마니아들은 잘 알겠지만, 이 사건은 뻥이다.
사마의는 당시 형주(荊州) 도독이었고 완성(宛城, 현재의 허난성 난양시)에 있었기 때문에, 제갈량이 있던 서성(西城, 현재 샤시성 안캉시 서북)으로 그리 빠르게 갈 수가 없었다. <삼국연의>의 기술처럼 제갈량의 모습을 볼 정도로 위군이 진격했다고 하면, 강궁 몇 발로 저격하는 것도 가능했을 일인데 그조차도 하지 않았다는 건 이상하다. 척후병 정도가 그 광경을 보고하자 위군 장수가 꺼림칙하게 여긴 나머지 진군을 늦추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겠고, 실화는 맞는데 시공간이 잘못 전해졌다는 설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진실은 알 수 없다. 최소한 제갈량의 공성계는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다. 비슷한 상황은 오히려 조운과 문빙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공성계가 언제 처음 얘기 되었느냐면, 진(晋) 나라 때 곽충(郭沖)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제갈량의 다섯 가지 이야기(亮五事隱沒不聞于世者, 보통 郭沖五事라 불림)’란 이야기에 나온다. 진수의 <삼국지>는 부정확하다 여겨지는 사료들을 많이 배제했기 때문에 분량이 비교적 적다. 이로부터 약 180년 후 남북조 유송(劉宋)의 배송지(裴松之)가 다른 자료를 대거 참고해 주(註)를 달았고, 이를 ‘배송지주(裴松之註)’라 부른다. ‘곽충오사’는 이 배송지주에서 비판되고 있으니 공성계를 둘러싼 논쟁의 역사가 굉장히 오래된 셈이다.
곽충은 <삼국지>의 저자 진수와 마찬가지로 진나라 때 사람이니(생몰은 불확실하다), 삼국의 분쟁이 수습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의 인물이다. 그때부터 이미 제갈량을 신격화하고 조조를 폄하하는 관점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역시 진나라 사람인 습착치(習鑿齒)의 <한진춘추 漢晋春秋>에는 처음으로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이 등장한다. 서진(西晋) 시절의 진수와 달리 습착치는 동진(東晋) 시대 사람으로, 이때엔 이민족에게 북방을 뺏긴 상태였으므로, 한족(漢族)의 왕조만이 정통성이 있다는 역사관이 유행할만한 환경이었다.
진(晋)나라 때부터 제갈량의 신격화와 촉한정통론이 불거져 나왔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정사(正史)와 <삼국연의>, 즉 역사와 허구가 생각만큼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책이 그러하듯 진수의 <삼국지> 역시 개인의 관점과 당시의 환경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을테니, 왜곡의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를 뒤집어 보면, 같은 진나라 때의 ‘곽충오사’나 습착치의 <한진춘추>도 마냥 촉(蜀)을 찬양하는 허풍선이가 아니라, 어떤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조조의 재평가가 우세하며 촉한정통론은 소설적 허구라고 보는 입장이 대세다. 하지만 삼국의 역사를 둘러싸고 어떤 입장이 대세로 혹은 허구로 치부되는 변화는 수없이 있어 왔다. 그 와중에 삼국을 다룬 역사서와 구전설화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 엄격한 의미에서는, <삼국연의>와 진수의 <삼국지>를 비교하여서는 진위를 가릴 수가 없다. 당신이 10살 때 쓴 일기장을 놓고 현재의 당신과 비교한다면, 그 사이 있었던 수많은 사건들의 영향을 반영하지 못할 것이기에, 또한 그 일기장을 언제 읽느냐에 따라서도 해석이 다를 것이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삼국연의>에 들어간 허구를 사서(史書)와 비교해 밝히려는 작업에는, 동시에 그 사서에 어떠한 허구가 또한 개입될 수 있는지를 분석하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한 가지 물음이 추가돼야 하는데, 그것은 사서에 없는 허구가 <삼국연의>에 어떻게, 왜 들어갔느냐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경우에 따라선(아마 상당량) 추측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정사 <삼국지>에는 몇 줄 되지 않는 ‘적벽대전’이 <삼국연의>에선 상당한 분량이거니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학문적 입장에서 그런 대목은 허구다. 다만 <삼국연의>의 허구들 중에서 실제의 침소봉대와 구전 중의 창작 요소를 완벽하게 가려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연의>는 소설이라는 근대적 문학 체계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삼국연의>는 또다른 역사책이다. 명나라 나관중은 <삼국연의>를 종합했던 수많은 인물들 중 한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명나라 이전에 삼국에 관한 언급과 비평을 남긴 인물은 숱하다. 그들 역시 당대의 <삼국연의>를 접했을 것이며 또한 사서와 비교했을지 모른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문인 금성탄(金聖歎)이 남겼다는 <삼국연의>의 서문. 그러나 위 서문은 청나라 모종강(毛宗崗)이 그의 이름을 빌려 넣었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당시엔 이름난 옛 문인의 이름을 꾸어다 쓰는 일이 흔했고, 금성탄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점이 <삼국연의>의 위작, 허구, 비평을 구분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삼국연의>의 특이한 성격은 우리에겐 다른 숙제를 남긴다. 독자들 중에서도 <삼국연의>를 읽은 후 사서들과 비교하는 소위 ‘재야 고수’들이 있고, 내공이 심후한 사람도 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니, 연구가 더 심화될수록 함부로 당대의 역사와 인물을 언급하기 어려워지는 게 당연하다. 다만 이러다 보면 자연히 연구 대상에 대한 엄숙주의적인 태도가 생기게 된다. 일반 독자들이 <삼국연의>만 읽고 인물평 한마디라도 할라 치면, 시쳇말로 뭣도 모르면서 까불지 말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그 삭막한 반응의 이유를 짐작 못하는 건 아니다. 예전에는 애독자라고 하면 작가별로 몇 개 판본 읽고서도 ‘아직 초보입니다^^’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요즘엔 게임이나 영화에서 얻은 이미지를 진실로 믿는 이들이 많은데다, 제 무식의 밑천도 모르면서 익명성을 무기 삼아 반말에 욕지거리부터 날리는 찌질이들이 허다하니, 곱게 지식을 전수해줄 마음이 나지 않는 게 당연하다.
다만 엄밀하게 보면, 사서와의 비교 작업은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려는 학문적 접근방법이지 그 자체가 진실을 보장하진 않는다. ‘나는 삼국지의 진실을 알고 있다’라곤 누구도 말할 수 없으므로, 찌질한 접근 태도를 비판하더라도 그 근거가 지식의 유무일 수는 없다. 지식의 축적 여부가 권위의 근거로 행사되려면, 그 대상은 같은 연구자여야 의미가 있다. 고수의 무공 수위는 같은 무도인끼리의 비무를 통해선 비교가 가능하다. 그러나 육합검법 초보자와 독고구검의 고수가 겨룬다면 그건 비무를 핑계로 한 일방적 폭행치사로 봐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별것도 아닌 시정잡배가 함부로 조조와 유비, 제갈량을 언급하고, 고수들이 그 시시비비를 가려내는 과정을 통해 <삼국연의>의 해석이 더욱 풍성하게 될 여지도 있을 것이다.
이상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의 현실을 지적하고자 시작한 것이 아니다. <삼국연의>를 허구맹랑한 소설로 보지 않고, 그 안에서 어떤 역사적 힌트를 얻으며, 이를 사서와 대조하면서 또한 사서의 곡직을 가리는 일이 바로 중국 본토에서 행해진 작업이었다. 최근 이것이 TV에 방영되면서 엄청난 인기를 얻은 사람이 이중톈(易中天) 교수다. 그리고 엄숙주의적인 학자들이 ‘역사학 비전공자’란 이유로 그를 비판하며 고수의 내공을 시전하였고 말이다.

<21세기에도 장안의 지가를 올린 이중톈 교수>
이중톈 교수는 중국 CCTV의 ‘백가강단(百家講壇)’ 프로그램에서 <삼국연의>를 강의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필자도 그의 강의를 본 기억이 있다. 호텔방에 있다가 무심코 TV를 틀었는데, 시간 흐르는 것도 잊고 그의 이야기에 홀딱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때 그의 강의 내용은 천자를 둘러싼 원소와 조조의 입장 차이였다. 원소의 모사인 저수(沮授)가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挾天子以令諸侯)’하라고 했던 기록(<삼국지> 무제전(武帝傳) 배송지 주의 헌제전), 그리고 모개가 조조에게 ‘천자를 받들어 불충한 신하에게 호령(奉天子以令不臣)’하라고 간언한 대목(<삼국지> 모개전)을 지적하며, 이러한 입장 차이가 조조에게 보다 유리한 형국을 제공했다는 이야기였다.
이중톈 교수의 ‘품삼국(品三國)’ 강의는 우리나라에도 <삼국지강의>란 이름으로 출판돼 있으므로 구해보기 어렵지 않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공성계 이야기도 이 책에 소개돼 있다. <삼국연의>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 책을 놓치지 마시라. 그리고 조심해야 한다. 웬만한 내공 고수가 아니고서는 이 책 앞에서 찍 소리 못하고 압도되고 말 것이다.

이 책은 사서와 <삼국연의>를 비교하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작업인지를 보여준다. 일례로 조조가 허자장에게 인물평을 청해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간웅’이란 말을 들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책에서는 이 말이 역사서에는 서로 다르게 표현되어 있음을 밝히고, 그 중 어느 사서의 말을 채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 근거는 무엇인가에 관한 치열한 추론이 이어진다. 사서라고 하여 무조건 믿지는 않는 태도가 견지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내용 상당 부분은 이후에 다루어질 인물 평가에서 소개될 것이다. 여기서는 <삼국지강의> 일부 내용을 통해, 중국의 <삼국연의> 평가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가에 초점을 맞춰보겠다.
<삼국지강의> 하권 제36강에서는 유비의 영안탁고(永安託孤), 즉 백제성 영안궁에서 유비가 임종을 맞이하면서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정사 <삼국지> 제갈량전에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강조는 필자가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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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재능은 조비의 열 배입니다. 나라를 태평하게 안정시키고 대업을 이루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선생을 불러 향후 일처리를 의논하는 것입니다. 만약 유선이 그럭저럭 괜찮으면 그를 보좌해주십시오. 그러나 그 아이가 장래성이 없다면 선생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도 무방합니다. |
그리고 제갈량은 유비의 말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다할 때까지 충절을 다할 것을 맹세하는 대목이 이어진다.
<삼국연의>를 읽은 사람들은 여기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대신 보위에 오르는 일’로 알고 있다. 그건 <삼국지>의 저자 진수도 마찬가지였다. 진수는 이를 두고 “예로부터 지금까지 볼 수 있는 군신 관계 중에서 가장 공평무사한 본보기”라고 평했다. 사서와 <삼국연의>의 입장이 같으니 더 할 말이 있을까? 이중톈은 이어 역사가들이 어떤 의심을 품었는지 소개한다.
진(晋)나라의 손성(孫盛)은 유비가 임종의 상황에서 실언을 했다고 생각했다. 제갈량을 믿는다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요, 믿지 못한다면 더욱 할 필요가 없으니 제갈량이 딴 마음을 품지 않은 건 순전히 유비가 운이 좋아서였다는 것이다. 명나라 말엽 왕부지(王夫之)는 <독통감론 讀通鑑論>에서 이것을 정치음모론처럼 해석했다. 유비는 제갈량이 유선을 밀어내고 황위를 찬탈할까봐 매우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재능, 명망, 민심 어느 면에서도 유선은 제갈량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비는 아예 이 문제를 입밖에 꺼내어 제갈량이 차마 그러지 못하도록 옥죄려 저런 말을 했고, 그런 말을 들은 이상 제갈량은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짱줘야오(張作耀, 1931~ , 중국 역사학자) 역시 <유비평전 劉備評傳>에서 유비가 제갈량에게 충성을 강요하기 위해 탁고를 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제갈량을 조비와 비교한 첫 마디 또한 의미심장하다. 유비와 제갈량 입장에서 조비는 제위를 찬탈한 망나니다. 조비보다 재능이 열 배라는 말이 제갈량에게 칭찬일 수 있을까? 그보다는 듣는 이가 자신을 조비와 비교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이 말의 의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조비보다 훨씬 똑똑하니 그와 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으리라 믿소’가 그 말의 진짜 뜻이 아닐까.
이러한 해석들은, 유비와 제갈량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봐야지 무슨 성현처럼 대해선 안된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다만 이들 해석은 유비의 마음을 추측하는 것이므로 근거 있는 정설로 받아들이기엔 한계가 분명하다.
팡베이천(方北辰, 1942~ , 중국 역사학자)은 여기에 그럴듯한 해석을 더한다. 앞서 강조한 대목의 원문은 ‘自取其是’로,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스스로 취하다’는 뜻이다. 팡베이천은 여기서 ‘취하다’의 목적어가 ‘제위’가 아니라 ‘다른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유선이 모자랄 경우 제갈량이 제대로 된 다른 후계자를 골라 취하라는 얘기다. 유비의 아들은 유선 말고도 유영(劉永)과 유리(劉理)가 있었고, 그 중 유영에게는 유비가 숨을 거두면서 ‘너희 형제들은 승상을 아버지처럼 대하고 함께 일을 해야 한다’고 유선과 똑같은 유언을 남겼다(<삼국지> 선주전(先主傳) 배송지주 제갈량집). 때문에 제갈량에게 폐위의 권한을 주었다는 해석은 어느 정도 근거를 갖는다. 신하에게 폐위의 권한을 준 것만도 당시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며, 유비가 제갈량을 철석같이 믿었다는 증거라고 봐도 좋으니, 이 해석은 ‘황위 찬탈 허락’이란 파격을 피하면서도 <삼국연의>의 이미지를 훼손시키지 않은 절충안이라 하겠다.

<충칭(重慶)시 펑지에(奉節)현에 위치한 백제성에는 영안탁고 장면이 재현되어 있다.>
그 다음부터 이중톈은 자신의 생각을 내놓는다. 과연 유비와 제갈량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으로 친밀했는지, 아니면 일반적인 군신관계로 봐야 하는지가 여기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이중톈은 적벽대전을 기준으로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는 예전 같지 않았다고 본다. 유비가 촉으로 들어갈 때 유비를 호위했던 모사는 방통(龐統)이었고, 이후에는 법정(法正)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생각해보면, 제갈량은 중요 전투 때마다 유비의 곁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관우가 죽은 후 유비가 동오 정벌에 나섰을 때, 제갈량이 반대를 했다곤 하지만, 어째서 유비를 호위하지 않았던 것일까? 촉의 내정이 시급했다 한들 오나라와의 전쟁보다 중요했을까? <삼국지> 법정전(法正傳)에 보면, 유비가 효정에서 패한 후 제갈량은 크게 탄식한다. “만약 법효직(法孝直)이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터인데.” 이 대목은, 유비가 이미 제갈량의 말을 듣지 않고 법정에게 기울어 있었다는 증거로 읽힌다. 불행하게도 법정은 1년 전 병사한 뒤였고, 유비에게 간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제갈량조차도.
그러나 임종시 유비가 탁고를 할 상대는 누가 봐도 제갈량밖에 없었다. 때문에 유비는 또 한 명을 불러 이를 견제하고자 했으니, 그것이 상서령 이엄(李嚴)이다. 영안탁고 당시 제갈량과 이엄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삼국연의>에도 나와 있다. <삼국지강의>에서는 이와 관련해 ‘제갈량이 진짜로 황위를 찬탈할 경우 이엄이 군을 일으켜 충성을 다하도록’ 한다는 추리도 내놓고 있지만, 여기서는 일단 생략하자. 최소한 유비가 영안탁고 당시 제갈량의 ‘대항마’로서 이엄을 선택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엄은 유표 밑에 있다가 그 아들 유종이 조조에게 투항할 때 유장에게 왔던 인물이다. 원래 유비 휘하의 인물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유비가 무엇을 보고 제갈량과 함께 이엄을 임종 자리에까지 불렀단 말인가? 그러니까 여기서 ‘대항마’란 정치 세력의 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촉(蜀)은 원래 익주(益州)라 불렸고, 이 지역에서 관리를 지내거나 낙양에서 출세해온 호족 세력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다 혼란기에 유언(劉焉)이 이 지역에 자리잡고, 유장이 그 뒤를 이어 익주목(益州牧)이 되면서 유장 휘하의 정치 세력이 끼어들었다. 이들 사이에 권력 갈등이 있었던 건 뻔하다. 그러나 유비가 이 지역에 들어오면서 기존의 갈등 세력은 모두 구세력이 되어 버린다. 크게 보아 익주의 호족세력과 유장을 섬겨온 사람들이 구세력, 유비 휘하의 장수들이 신세력이 되는 것이다. 유비의 입장에서는 나라의 안정을 위해 구세력과 신세력의 권력 안배를 생각지 않을 수가 없다. 이엄의 개입은 이러한 권력 균형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만약 법정이 살아 있었다면 유비는 당연히 그를 탁고의 자리에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은 촉의 전권을 쥐게 되며, 상대적으로 이엄은 영안에 머물러 중앙 권력에 접근하지 못하게 된다. 이후 이엄은 제갈량을 상당히 자극하게 되는데, 제갈량은 결국 이엄을 파직하여 내쫓는다. 영안탁고 8년 후의 일이다. 이엄과 제갈량의 갈등을 놓고 역사가들은 이엄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했다고, 혹은 당시 상황에서 이엄의 무리한 요구에 제갈량이 양보하다가 부득이하게 내쳤다고 보는 입장으로 나뉜다. <삼국연의>는 당연히 후자다. 그러나 이유가 어쨌든, 신흥 세력의 대표인 제갈량이 구세력 인물인 이엄을 내친 건 권력 균형에 있어 갈등의 불씨를 지피는 일이었다. 이에 제갈량은 이엄에 대한 처벌은 공정하고 공평한 법에 의거한 것이며, 결코 사사로운 정이 개입되지 않음을 천명하여 갈등을 무마하고자 했다.
대신 제갈량은 아주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촉에 인재가 많지 않았고, 모든 장수들이 마속의 사형을 말렸다는 사실은 <삼국연의>에도 잘 묘사돼 있다. 그러나 제갈량은 예전 이엄을 내치면서 공평무사한 법의 적용을 약속했기 때문에, 구세력의 반발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 법대로 자신의 수하를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속의 죽음은 제갈량의 넋두리대로, 마속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제갈량 자신의 책임이었던 것이다.
이상은 <삼국지강의> 36~39강에서 촉의 세력 균형과 관련된 내용을 추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중국에서 <삼국연의>는 실제 역사의 흐름을 읽는 자료로서 연구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삼국은 그들의 역사니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삼국연의>의 신화적 요소들을 그들 스스로가 제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의 깊게 받아들여야 한다. 과거의 문학을 현실성 있게 해석하고 실제 역사와 결합시키는 작업이 반영되면서, <삼국연의>를 읽는 독자들은 풍부한 역사 상식을 자연스럽게 흡수한다.
그러다 보면, 그 연구대상에서 제외된 허구까지도 실제 역사와의 결합처럼 착각하기 쉽다. 가령 <삼국지강의>에는 남만(南蠻)의 맹획(孟獲) 이야기는 자세히 다뤄지지 않는다. ‘칠종칠금(七縱七擒)’은 사실이 아니라는 언급이 있긴 하지만,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서 위촉오의 역사적 배경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면, 해석되지 않은 남만 정벌 이야기까지도 그렇게 인식할 수 있다는 얘기다. 촉(蜀)의 사서(史書)는 따로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중국 학자들이 일부러 무시했다고 보긴 어렵다. 다만 주의는 해야 한다.
<삼국지강의>의 내용이 이중톈 교수의 독자적 성과는 아니다. 이중톈 교수의 최대 공로는, 학자들의 성과물을 종합하고 재조명하다 보면 으레 인용된 원서보다도 더 어렵고 복잡한 내용이 되기 쉬운데, 그것을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고 엮어냈다는 데 있다. ‘백가강단’ 프로그램이 대히트를 치면서 그는 인세만으로도 몇백만 위안을 벌어들이는 부자가 되었으며, 그의 예전 저작물들도 덩달아 인기작이 되었다.

이중톈 교수는 고문학 전공이니까 <삼국연의>를 다루는 게 외도는 아니다. 그렇긴 해도 그의 성공에 비하면, 남모르게 땀흘렸던 사학자들의 공로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은 건 분명하다(이중톈 역시 학자로서 오랜 시간 가난을 견뎌야만 했다). 또한 학문적 입장에서 이중톈 교수의 태도가 마뜩찮게 보였을 수도 있다. 같은 인문학으로 분류되더라도, 문학 계열에서는 작품의 새로운 해석이 각광받기가 용이한 반면, 사학 계열에선 굉장히 보수적이다. 이를테면 이중톈 교수는 <삼국연의>에 묘사된 조조의 모습이 폄하되었으며 중국인들의 일반적 인식도 이를 따른다고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어 선입견을 뒤집는 일은, 문학계에서는 잘못이 아니며 오히려 당면과제라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학계에서는 사서 연구를 통해 정리된 ‘조조론’을 넘어, 이중톈 교수의 ‘인식 충격’이 자칫 학설의 부정으로 확산될까 근심하게 된다.
톈싱지엔(天行健, 본명 朱健) 교수의 <청산품삼국 淸算品三國>은 중국 사학계의 이러한 불만을 드러낸 책이다. 치치하얼(齊齊哈爾)대학 역사과 교수인 그는 이 책에서 중국에 불었던 소위 ‘이중톈 현상’을 비판하는 한편, <삼국지강의>의 내용이 중국 사학계의 학설과 어떻게 다르고 무엇을 간과했는지 조목조목 따져놓았다. 이 내용도 기회가 있을 때 이후에 다루도록 하겠다.
정작 필자가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중톈 비판보다도, 그가 <삼국지강의>에서 인용한 사서들이 결코 임의로 선별된 것이 아니라, 중국 사학계에서도 중요하게 활용되는 자료였다는 점이었다. 어떤 대목에서는, 톈싱지엔과 이중톈은 같은 사료를 놓고 다른 결론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중국 사학계의 투철한 유물사관(唯物史觀)이었다. 그들은 삼국시대의 갈등 역시 계급론의 시각에서 해석한다. 이 부분은 특히 <삼국사강의> 하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가장 재미없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한편 가장 근본적으로 <삼국연의>의 인식을 바꿔주는 챕터이기도 하다. 계급론적인 해석에 의하면, 삼국의 성립은 모두 벼슬길을 독점하고 있던 사족(士族)계급에 대항하여 성립되었으며, 대처 방법이 제각기 달랐으나 결국은 철저하게 패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가령 조조가 예형을 미워하고 공융(孔融)을 죽인 일 하나하나는 이유가 다를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사족계급과의 갈등이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중국 사학계의 사회주의적 유물사관이 물론 <삼국연의>를 해석하는 유일한 방법론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인물 중심으로 삼국의 역사를 인식하는 경향과 비교하면 훨씬 폭넓은 시야를 제공해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필자도 이를 통해 한 가지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인치(人治)와 법치(法治)의 순환이다.
권력을 얻은 세력은 그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려 하고, 그것이 완성되어 굳어지면 일종의 지배계급이 형성된다. 이들은 법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을 말살한다. 지배계급의 정치가 인치(人治)라면, 이에 도전하고자 하는 세력은 법치를 내세우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실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게임 <디아블로>의 결말처럼, 마왕을 죽인 자는 곧 마왕이 되며, 지배계급을 쓰러뜨린 자들은 그 즉시 그들의 자리를 대체한다. 법치는 오직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며 현실에 군림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환상을 버리지 못한다.
한국 일본은 텍스트로 <삼국연의>를 읽었다고 하지만, 중국인들에게 <삼국연의>는 자신들에게 있었던 과거의 한 자락이다. 애초에 그들이 제갈량에게 환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아마도, 실현되지 못한 제갈량의 정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제갈량은 촉의 절대권력자였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그 권력을 쓰지 않았다. 그가 촉에서 공평무사한 정치를 펼친 시기는 아주 짧았음에도, 촉의 백성들은 그를 칭송했고, 위나라가 망한 후 진(晋)나라 때부터 ‘빠돌이’들이 생겨날 정도로 평판이 높았다. 제갈량이 천하제일모사로 묘사된 것은 그러한 영향하에 벌어진 일이리라. 결론적으로, 제갈량 신격화는 곧 ‘법치사회 실현의 환상’과 맞물려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제갈량이 일찍 죽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지 않았다면 당연히 불가능했을 환상이다.
중국에서도 <삼국연의>는 오락적 변형을 거쳐왔다. 일본의 영향을 받아 중국에서 개발된 온라인 게임도 있다. 보통 중국인들은 TV 드라마로 <삼국연의>를 더 많이 접했을 것이다. 요즘도 새로운 버전의 <삼국 三國>이란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작년엔 오우삼 감독의 <적벽대전>도 개봉했었다. 영상 기술의 축적과 자본력을 바탕으로 이들 <삼국지>는 갈수록 화려해지고 웅장한 멋을 더한다.

그러나 중국에는 다른 매체의 활황 못지않게, 텍스트로 된 <삼국연의>의 소비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마오저둥 역시 <삼국연의>의 애독자였으며, 여러 차례 공식석상에서 조조를 칭찬하는 말을 남겼다. 이 때문에 <삼국연의>는 마오의 사상에 따라 다소 작위적인 ‘조조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졌으나, 최소한 다른 전통 문학들처럼 문화대혁명 시기에 압살되지는 않았다. 중국 어디에나 있는 관제묘(關帝廟)가 파괴당하는 와중에서도 청두(成都)에 있는 무후사(武侯祠, 제갈량의 사당)는 건드리지 않았던 걸 보면, 마오저둥의 언급이 아니었더라도 <삼국연의>의 생명력은 여전했을지 모르겠다. 역사적 맥락의 <삼국연의> 재조명이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데에는, 중국에서 텍스트 문화의 힘이 여전히 강력한 때문이었겠다. 한국 일본의 <삼국연의> 해석에 비교해 중국이 엄숙함을 유지하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중국 젊은이들도 갈수록 책을 읽지 않고 있다 하니, 중국에서도 <삼국연의>의 엔터테인먼트화가 빠르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첨언하자면, 우리나라에선 중국의 <삼국연의> 해석을 ‘한족 위주의 역사관 주입’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필자 생각에는 그것만으로 단언하기엔 좀 무리가 있다. 공식적으로는 부인하나 중국 학계에 그러한 역사관이 있고 그에 따른 작업이 진행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적, 역사적 왜곡을 염두에 두고 <삼국연의>를 해석하고 새로운 판본을 만들어낸다 하여,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삼국연의>를 중국 독자들은 그저 환영하겠는가? 중국 학계를 ‘중국 정부가 시키는대로 따라가는’ 식으로만 보는 건 지나친 단순화 아닐까?
이중톈이 각광받게 된 ‘백가강단’ 프로그램이 몰락한 이야기가 여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이중톈에 이어 논어를 강의한 위단(于丹) 교수도 이 프로그램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 34세의 허난성 공무원 리레이(李?)가 강의를 맡아 ‘홍기거(紅旗渠) 이야기’를 선보였다. ‘홍기거’는 1969년 완공된 인공하천으로 현대 중국 건설의 상징처럼 언급된다. 당장 시청자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프로그램의 인기를 등에 업고 정부 홍보물을 끼워 넣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관영통신과 일부 여론에서 이를 옹호하긴 했지만, 그 후 ‘백가강단’은 예전의 인기를 되찾지 못했다.
청의 강희제(康熙帝)는 조조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제갈량을 높이 보아, 모종강 판본을 비롯한 청대의 판본은 하나같이 조조를 악인으로 묘사했다. 황제의 평가를 거스르는 저작을 냈다간 모가지가 날아갔을 테니 말이다. 촉한정통론을 한족의 역사관과 동일어로 이해하게 되면, 강희제의 평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촉한정통론이 한족 위주의 역사관에서 발생했고, 송나라처럼 나라가 위협받을 때 더욱 창궐했다는 건 사실이다. 다만 정치적 의도만을 염두에 두고 <삼국연의>를 대하는 태도도 너무 편협하니, 상황을 구분하고 얘기하자는 것이다. 앞서 말한 마오저둥의 경우에도 무슨 역사관과 정치적 의도보다는, 오랜 고난을 겪다 건국에 이른 자신이 조조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를 칭송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음에는 이제 진짜 본격적으로 들어가, 최고/최악의 장수를 한번 이야기해보겠다. 미리 말씀 드리자면 이 제목 자체는 ‘떡밥’이다. 중요한 건 ‘장수’란 무엇인가(동탁과 손견은 장수인가 군주인가?), 최고/최악의 기준은 어떻게 정해야 하는가다. 다음 시간까지 열심히 궁리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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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좋은 글이나 한계가 여실히 들어나는 부분이 많이 보이는군요.
일단 이중텐의 삼국지에 대한 논리가 얼마나 얕고 편엽한 시각으로 삼국지를 바라 보고 있는지는
웬만한 삼국지 매니아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엄과 마속에 관한 부분 역시 삼국지 촉나라의 정치구도를 조금만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면 언급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가장 황당한 부분이 왜 중요한 전투에 제갈량은 없었나인데..
모든 전투에서 제갈량은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아직도 삼국지 연의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데,
고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보급입니다.
당시 보급이라는 게 지금처럼 수송차로 막 날라줄 수 있던 게 아니라
한 지역에서 생산되는 병참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꾸준히 전투지역으로 보내줘야하는데
이 임무는 언제나 그 세력의 가장 뛰어난 인물이 담당하는 겁니다.
특히 방통, 법정과 제갈량의 임무는 그 중요도에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유비가 촉을 정벌하러 갔을 때 같이 떠났던 인물은 방통입니다.
그리고 제갈량은 방통이 죽을 때까지 형주에 남아 있었는데 이것은
촉을 정벌할 때까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본거지인 형주를 최대한 빨리 수습하고
발전시키는 게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한중전에서도 후방을 담당하는 게 제갈량인데, 하후연과의 대립에서 유비는 상당히 고전을 합니다.
이 때문에 한중전은 생각보다 장기화가 되는데,
이 때 제갈량이 그것에 맞추어 제대로 지원을 해주지 못했다면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일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유비가 이릉전 때 역시 제갈량은 후방을 담당합니다.
그 당시 유비군의 세력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최소 5만 이상인데, 전쟁기간만 1년이 넘습니다.
5만이 넘는 군사의 병참을 보급하는 일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고
성도에서 이릉까지는 거리도 상당한데다 병참이 끊기는 순간
5만의 군사는 상황을 불문하고 퇴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유비라면 제갈량을 기어코 끌고가 병참을 끊기게 만드는 불상사를 만들겠습니까.
아니면 후방에 남겨 자신을 최대한 지원할 수 있게 하겠습니까.
제갈량이 스스로 북벌을 할 때 가장 힘들었던 것도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후방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
이른바 '촉한 정통론자'로서,
삼국지의 주제의식이랄까..
말하자면 '천시가 불여 지리고 지리가 불여 인화'라는 말처럼-
어떤 움직이기 어려워 보이는 대세가 어떻든,
환경적 유/불리함이야 어떻든
'사람'들이 도모하면, 이 모든 불리함을 딛고, 능히 일(?)을 낼 수 있다. 로 이해하고
탁현 누상촌에서 돗자리짜던 어떤 황실의 먼 친척뻘(이라 주장하는) 농부가 마침내 황제에 까지 오른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보며-
'중원을 빼앗겼지만, 원래 주인은 우리'라는 공감 열폭(무능함을 변명하기 위한 일종의 '정신승리'차원)을 확대 재생산하려는 무능한 집권층의 자기 변명적 의도와
중앙 정부의 무능함과 토호들의 횡포에 맞서, 자발적으로 일어선 평민(출신 영웅)들의 일종의 '성공스토리'를 칭송하고, 꿈꾸는 민간의 지향이 동상이몽 결합, 흥행에 대박 롱런해 온 것이 아닌가.. 일케 본다는 것-
(본문을 보고 나니.. 거기다 '이상적 법치'에 대한 갈망도 크게 포함되어 있겠다고 생각됩니다만)
어쨌든 각기 다른 욕망이 투영된 이 소설은..
심지어 때로는 '역사적 진실'을 안드로메다로 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주인공은 평민출신 선군 유비(+제갈량)'이고, 조조는 '간신' 구도가 확립될 때, 비로소 주제의식이 살아난다.. 이렇게 본다는 것인데...
'다만 정치적 의도만을 염두에 두고 <삼국연의>를 대하는 태도도 너무 편협하니, 상황을 구분하고 얘기하자'는 저의에 살짝 동의하기 어렵습니다만.. ('누가 뭐래도 삼국지의 주인공은 유비(사후에는 제갈량)라능...ㅠㅠ')
아홉친구님의 굉장한 내공을 믿고, 이후의 전개역시 기대해 봅니다. -
//‘적벽대전’이 <삼국연의>에선 상당한 분량이거니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학문적 입장에서 그런 대목은 허구다. 다만 <삼국연의>의 허구들 중에서 실제의 침소봉대와 구전 중의 창작 요소를 완벽하게 가려낼 수는 없을 것이다.//
...라는 본문은 기본적으로 동의합니다...+5
하지만 개인적으로 [거꾸로 읽는 삼국지] 라는 서적을 잼있게 읽은 사람으로써 이런 잼있는 시각도 있다는 것을 알리는 의미로 한번 옮겨본다...물론 삼국지 매니아 및 고수분들이야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만...
//적벽대전은 중국 역사를 보건데 기원 208년에 일어난 싸움으로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적벽대전에 참여해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중국 사료인 위나라때 어환이 편찬한 [위략](이것은 제갈량과 동시대 인물에 의해 쓰여진 당시의 현대사라고 할 수 있다.), 위나라 출신의 진나라 학자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 중에서 -<손권전>, <주유전>, <강표전>, <방통전>, 그리고 남송때 배송지가 여러 사서를 참조하여 진수의 [삼국지]에 주를 단 [삼국지], 그리고 북송때 사마광이 편찬한 [자치통감] 등을 참조하자면 적벽대전은 소설과 아주 사실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씩 짚어보면.
첫째, 주유는 소설에서 역량이 작고 질투가 많으며, 경쟁심이 강해서 눈앞의 득실을 따지는, 정치적 안목이 결여된 인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 담력과 지용을 겸비한 뛰어난 군략가로 기술되어 있다. 나관중은 제갈량을 우상화 하기 위해 허구성을 가미 시킨 것이다.
둘째, 제갈량이 주유의 명령으로 10만개의 화살을 조조로부터 구해오는 것도 허구이다. 역사를 참조할때 당시 쾌속선 20척으로는 10만개를 얻을 만큼 규모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실은 손권이 정찰을 나갔다가 발각되어 화살을 한쪽 배에 많이 맞아 배가 기울자 배의 방향을 바꾸어 그 쪽도 화살을 맞고 균형을 이루어 무사히 돌아왔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셋째, 주유와 동향 사람으로 조조 휘하에 있던 장간은 주유를 회유하기 위해 주유에게 갔다가 주유의 계략에 빠진 적이 없다. 역사는 적벽대전 이후 장간이 주유를 방문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넷째, 소설에서 주유를 만나고 갇힌 장간이 탈출중 방통을 만나 방통이 장간에 의해 조조에 잠시 등용된다. 그 방통은 조조에게 연환계를 쓰는데 허구이다. 역사는 적벽대전 당시 방통은 주유와 조조를 만난 적이 없고 적벽대전 이후 주유를 한번 만나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다섯째, 대전을 앞두고 황개가 반간계를 써서 거짓으로 조조에게 항복은 하였으나 고육지책은 쓰지 않았다.
여섯째, 제갈량은 적벽의 화공에 참여 한적이 없다. 따라서 동남풍의 큰바람을 하늘에서 불러온다는 기우제 또한 허구이다.
사료를 참조해보건데 적벽대전은 황개가 화공전을 입안하고 오나라의 총지휘자였던 주유에게 간하여 주유가 채택했으며, 주유의 명령에 의해 황개가 화공전을 직접 실행한 것으로 역사는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제갈량이 당시의 긴급한 시기에 비교적 정확한 정세를 분석하고 오나라가 조조와의 항전 결의를 굳게 다짐하게 함으로써, 손권과 유비의 연합을 촉진시키는데 결정적 역활을 한 것은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
[참조:거꾸로 읽는 삼국지]
//
아래 부분은 당시에 이부분을 읽고 나의 감상을 적어 둔것이다...^^;;
비아냥
와룡은 세 치 혀로
백만대군을 적벽에 화장했다하나
그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말이나 글로써
시비를 판가름 할 수는 없다.
근본에서 생각하고
행함에 떳떳함이 있을 뿐이다. -
여담으로 제갈량과 이엄의 정치적 갈등에 대해서도 써보려고 합니다.
제갈량과 이엄은 정치적으로 트러블이 상당한 있을만한 위치였던
유비 사후 제1,2 권력자들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제갈량이 이엄에 대한 처벌을 정치적 숙청이라 추측하고
단정짓는 경우가 많은데 앞뒤 사정을 제대로 보면 생각보다 설득력이 없는 말이라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제갈량은 일생동안 5번의 북벌을 하는데, 그 중에 가장 성공적이었던 북벌은
1,3,4차의 북벌이었습니다.
3차야 무도나 음평등을 차지했기에 성공이라 말하기 충분했다 하더라도
1차와 4차가 어떻게 성공이냐. 라고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을지라도 그 과정은 상당히 좋았습니다.
1차의 경우는 제갈량이 진격했을 당시 남안, 천수, 안정등이 호응하며 위나라에 반기를 들었고
위나라 역시 촉의 이릉전 패배를 알고 있었기에 제갈량이 그렇게 빨리 북벌을 감행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준비가 미미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제갈량은 조운 등지등을 기곡으로 보내 혼란 작전을 쓰며 조진의 본대를 묶어버립니다.
그 상황에서 제갈량의 본대가 장합과 대치하게 되는데, 이 너무나 중요한 전투애서
마속은 군령을 어기며 왕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리다가 대패를 하게 됩니다.
이 패배는 단순히 한 전투의 패배가 아니라 완벽한 준비와 타이밍을 노렸던 제갈량의
전체적인 전략 자체를 망쳐버린 패배로써 결국 제갈량은 백성 천세대와 강유라는 인물을 얻는
미미한 성과만을 얻게 됩니다.
이 때 전투에 가담한 마속, 장휴, 이성등이 징계를 당했고
황습은 병사를 박탈하였으나 오직 마속을 말렸던 왕평만 징계를 면하게 됩니다.
제갈량이 마속을 죽인 이유는 군령을 어겨서도 있고 법치를 중시해서도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너무나 뼈아프고 돌이킬 수 있는 실수를 본인의 과신에 의해 범했기 때문입니다.
유비의 이릉전 이후 인재부족으로 조조보다도 더 심할 정도로 도덕적인 잣대를 보지 않고
능력있는 인물을 마구잡이로 다 가져다 쓴 제갈량이 그가 가장 아꼈던 마속을 죽일 정도였다면
그의 실책이 얼마나 뼈아팠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제갈량 스스로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생각했기에 자신의 관직을 낮추게 됩니다.
이야기를 조금 바꿔서 4차 북벌을 보면 진수의 삼국지 제갈량 전에는 그 기록이 미미하기 그지 없습니다.
단순히 건흥 9년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했고 목우로 운송을 했으며 군량이 떨어져 퇴각을했다.
장합을 쏘아 죽였다. 라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삼국지 이외에 이 때의 기록을 서술한 책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진서이고 다른 하나는 한진 춘추입니다.
진서의 경우에는 제갈량이 진군해 산을 점거, 포위했고
사마의가 촉의 포위망을 풀고 제갈량이 밤에 달아나자
이를 추격해 1만에 헤아리는 적군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의 명으로 인해 쓰여진 이 삼국지에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 일컬어지는
제갈량을 상대로 이정도로 큰 대승을 얻은 사건을 진수가
빠뜨리고 기록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습니다.
또 위략을 보면 장합이 추격하는 적을 쫒지 말라는 진언에도 사마의가
고집을 부리며 추격을 명하다가 장합이 죽는 패배를 겪었고
진수의 삼국지 장합전에도 장합이 제갈량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 제갈량이 1만명이나 죽는 대패를 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죠.
-
오히려 그보다 더 설득력을 주는 기록은 한진춘추에 있습니다.
한진춘추에서는 제갈량과 사마의와의 야전에 대한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 결과만 빼놓고는
진서가 그대로 가져다 썼다고 생각될 정도로 비슷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기록을 보면 사마의는 제갈량과의 야전을 피하려고 노력했는데, 가허나 위평등이
'공께서 촉을 범처럼 두려워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찌하려고 합니까.' 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사마의는 싸우지 않으려 하자 주위의 모든 제장들이 싸울걸 청하고
겨우 사마의는 제갈량과의 전면전을 감행합니다.
이 전투에서 제갈량은 위연, 고상, 오반등을 보내 대파하는 어마어마한 대승을 거두게 되고
북벌에 승기를 잡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에 한중에서 들려오는 소식입니다. 장마비에 의해 식량 운반이
제대로 지속되지 못하자 이엄은 제갈량에게 후퇴하여 돌아아도록 서신을 전합니다.
이 때문에 제갈량은 너무나 좋았던 4차 북벌의 기회를 접고 퇴각하게 되며
퇴각하는 도중 장합을 죽이는 성과를 거두며 끝내게 됩니다.
1차, 준비가 미미했던 2차 북벌의 실패이후 3차의 무도, 음평을 장악한 것에 이어
사마의와의 대치에서 대승을 거둔 북벌의 이엄의 수송문제에 책임 회피를 하기 위한
비겁한 증언까지 한 이엄을 문책하지 않고 놔둔다는 것이 오히려
더 말이 안 될정도로 이엄의 실수는 컸습니다.
그리고 제갈량이 이엄을 정치적인 이유로 숙청을 했다는 의혹을 잠식시켜주는
몇 가지 기록이 더 있습니다.
먼저 이엄이 강주와 영안을 담당한 것입니다.
위의 본문에서는 이엄이 영안에 배치된 것이 제갈량이 이엄을 내치고 변방을
답당하게 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이씁니다만,
실제는 유비 사후 제갈량은 한중으로 출병을 하면서 이엄이 뒷일을 맡아줄 것을 생각하고
강주와 진도가 담당한 영안 일대를 모두 통솔하에 두는 어마어마하게
막중한 직책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한중이나 이릉전 당시 제갈량 자신이 했던 일이었고
유비가 가장 신임한 제갈량처럼 제갈량 역시 자신이 가장 신임한 인물이
이엄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또 위나라가 처음으로 촉으로 진군하다가 장마에 막혀 퇴각했을 때
조진의 진격을 막기 위해 이엄을 한중으로 불러 2만의 군사를 주어 막게하고
이엄의 아들 이풍에게 이엄이 담당하던 강주도독독군을 임명해 이엄이 하던
후방의 일을 담당하게 하면서 이엄에게는 승상부에 일을 맡도록하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족 전체에 주게 됩니다.
이는 제갈량이 이엄의 정치적 라이벌이라 생각했다면 주기 힘든
상당한 권한을 쥐어주게 되는 것이죠.
이엄의 권한은 이엄의 평민이 되면서 사라지지만 이풍의 직위는
처벌 이후에도 계속 지속이 됩니다.
더 놀라운 기록은 제갈량집에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엄은 제갈량에게 구석을 받고 공을 칭하라고 권유를 하게 됩니다.
구석을 받고 공을 칭하는 것은 본인이 뿐아니라 주위 제장이 황제에게
진언하여 수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 말은 즉 이엄의 주도 아래
제갈량에게 신하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권한을 주게 해주겠다는 말입니다.
이에 제갈량은 우리가 조예를 죽이고 한실을 되살리면 구석이 아니라
그보다 더 좋은 상도 받게 될 테인데 무리해서 받을 필요가 없다며 정중히 거절합니다.
제갈량과 이엄이 정치적 라이벌이라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지요.
-
결정적으로 제갈량과 이엄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이 이엄전에 담겨져 있습니다.
평민이된 이엄이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제갈량은 언젠가 자신을 다시 복직시켜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다시 기회를 주지 않을 거라며 격분해 병들어 죽어버리지요.
단순히 둘이 정치적 라이벌이었고 이엄의 파면이 제갈량의 숙청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많은 기록들의 그 가설을 부정해주고 있습니다.
기록이 조작되어 거짓이다. 억지를 부리지 않는 이상
기록에 근거한 앞뒤 사정과 그를 바탕으로 추론을 한다면,
이엄에 대한 파면은 정치적 숙청이라기 보다
너무나 좋았던 기회를 놓쳐버린 것에 대한 엄중한 처벌과 함께
다시는 이런 실수로 인해 북벌을 망쳐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제갈량의 각오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제갈량이 개인적으로도 이엄을 좋아했을지 아닐지는 알 길 없습니다.
그러나 능력적으로는 확실히 신임했다 짐작합니다.
일단 이엄은 죽임을 당하지 않고 파면만 당했습니다.
또 이엄의 아들은 작위를 그대고 가지고 있었는데다가
제갈량이 개인적으로 편지까지 보내 그를 위로합니다.
(당시 연자죄는 너무나 보편적인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작위를 유지한다는 건
그에 대한 대우가 얼마나 파격적인지 알 수 있지요.)
이엄만큼 제갈량이 신임했던 인물이 마속이었는데 마속은 참수까지 했던 게 제갈량입니다.
마속의 경우는 전군의 선봉을 맡았던데다 남만을 정벌할 때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인물로서
인재난에 시달렸던 제갈량이 가장 아꼈던 인물중 하나지요.
오히려 아무리 과오를 범했더라도 그렇게 죽일 수 있을까가 아니라
그렇게 아꼈는데 대체 얼마나 큰 과오였으면 죽이기까지 했을까..가 좀 더 옳은 시각으로 보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제갈량이 이엄을 신뢰했던 근거중 하나는 위의 촉으로이 진출시
이엄에게 2만의 군사를 위임시킨 것인데요.
제갈량의 경우 위연이 자오로 진출한다며 1만의 군사를 그렇게 위임시켜달라 떼를 써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엄의 경우는 바로 2만의 군사를 내어주며 수비를 담당시키지요.
말마따나 진짜 숙청을 하고자 했다면 죽이고 아들도 파면시켜 후환을 없애는 게
제갈량으로선 더 안전했겠지요.
실제 제갈량에 의해 죽은 인물이 유봉이나 팽양등 꽤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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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떡밥에.. 결국 회원 갑을 해부렀네..ㅋ 삼국지 좋아해서 본문을 한큐에 읽어내리긴 했지만 역시 내용은 어렵다 ㅠ 아는체 할라고 책 읽는 건 아니지만 진짜 어디가서 삼국지로 방구 좀 낄려면 읽어야 할 책이 한두권이 아니구만..
최고/최악의 장수에 대해 밥묵고 담배한대 피면서 나름 궁리해본 결과, 일단 '장수'라고 한다면 삼국지 겜에 나오는 인물이라면 모두 장수에 해당된다고 본다. 내가 신군주로 플레이하면서 죄다 내밑으로 등용할 수 있기 땜시. 근데 병사들 이끌고 맨앞에서 '돌격앞으로'나 일기토가 거의 불가능한 순수지략형 군사들은 장수에서 제외하는게 맞지 싶고. 뭐 그렇다면 동탁이나 손견도 장수로 불러도 하등 지장이 없을듯.
근데 최고의 장수라면.. 나는 단연 조자룡이라고 생각되는데..; 글고 너무 답이 뻔해서 오히려 필자분이 무슨 얘기를 하고싶어 하는 걸까 궁금했는데.. 의외로 조자룡을 '정답'으로 보지 않는 분도 꽤 있는것 같다. 여튼 그래서 다음 글이 무쟈게 기다려진다. ㅋ
갠적으로 최강은 여포, 최고는 조운(사실 나는 무력으로도 조운이 여포와 동급 혹은 여포 사후 최강이라고 보지만), 가장 멋진 장수는 관우, 가장 좋아하는 장수는 마초(잘생겨서) 여몽(이름이 귀여워서) 가장 멋진 커플은 육항과 양호 또다른 커플로 장료와 감녕을 들고싶다. 근데 제일 예뻤던 여자는 누구일까? ; -
가입이 축하받을 일인지는 몰겠지만 일단 감사 ㅎㅎ
마초란 아디/닉넴은 오래전부터 선점이 가능하다면 써왔는데 다른 분이 쓰고계신 경우가 많더라구요. 삼국지 글에 리플달아볼라고 닉넴 설정했더니 가능해서 낼름. 근데 이 마초는 순수하게 삼국지에 나온 마초를 말하는건데 예전부터 대마초 혹은 여성들이 혐오한다는 그 마초로 오해받은 경우가 많았죠. ㅋ
오히긴스 님 말씀에 하등의 이의가 없지만 실전, 전략가 이런 개념도 사실 따져볼라니까 너무 어렵더군요. 전쟁이랍시고 소위 무관들만 달랑 가서 전쟁할수는 없으니 문관들도 동행을 하던데 그 문관들은 전략에 과연 참가를 하는걸까도 궁굼하고 예를 들어 한중전에 참가해서 계륵 땜시 죽은 양수는 대체 뭐하러 전쟁에 간것이며, 연의에서 까막까치 어쩌고 한 시때매 죽는걸로 나오는 유복같은 사람도 그 임무란게 참 애매하더라구요. ㅋ 기본적으로 문무관의 구별자체도 애매하고요. 사실 머리가 꽤 좋은 인물이 있다면 일반적으로 문관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그런 사람들도 병서 좀 읽히고 전장 델고 다니면서 실전 좀 익히고 하다보면 왠만큼 센스가 없지 않은 이상 나름 전략도 내놓고 그러지 않겠나 생각하면(창천항로 보니까 조조가 실제로 일케 하더라구요).. 어찌보면 삼국지 최고의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되어버릴것 같고..
뭐 그래서 제가 제낀 쌈은 못하는데(못할것 처럼 보이는데) 머리 좋은 군사(오히긴스님이 말씀하신 실전을 몸소 지휘하는 전략가)까지 포함시켜보자면 제갈량, 방통, 법정, 곽가, 순욱, 가후, 노숙, 사마의 등등등 떠오르는데.. 이런 사람들까지 다 포함시키면.. 최고의 장수를 누굴 꼽아야할지.. 정말 어렵네요 ㅋ 제가 아는 쌈좀한다는 기준도 삼국지 겜 하면서 대충 익힌거다보니..;;
암튼 워낙 흥미진진한 주제라 아홉친구님의 다음 글만 기다리고 있네요. 덜컥 조조를 답으로 올리시는게 아닐까 하는 기대(?)도 해보면서 ㅋ -
문관들의 용도라..
오늘날 야전부대 참모부에 비유해서.. '인사-정보-작전-군수'로 크게 파트가 나뉘면
<작전>을 제외한 다른 파트는(뭐 사실 굳이 '작전'도;;) '문관'을 운용해도 전혀 상관이 없을듯
주둔/점령지의 민심안정/치안담당
물자조달~군량/마초의 분배
간첩 색출/적 정보 수집
공문서 작성.... 등등등
즉 참모부가 하는 대부분의 임무를 수행 할 수 있지요.
주둔지에서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얼마나 잘 발휘했거나 간에
지위나 종사 분야의 전문성, 학식의 고하를 막론하고 '야전부대를 지휘/운용경력이 있느냐'를 따져 보았을때
지휘관이 웬만하면 그에게 야전부대를 맡기지 않더라.. 혹은 스스로 맡아서 참전해 본 적이 없더라... 면
그런 경우가 '문관'이라 생각됩니다. ㅋ
'전략가'와 '장수'의 차이라면...
뭐 의학자와 의사의 구분.. 법학자와 법관의 구분법도 유효할듯
'책상물림 주제에... 니가 야전을 알아?'라는 문구도 있죠. -
몇달만에 로그인하는건지. 삼국지 연의의 내용을 순수하게 즐겼던 사람으로서 최근에 안그래도 다른 세계관을 접해본답시고 장정일판을 사서 후루룩 읽고 있는데 뭔가 공평하고자 하는(특히나 동탁 여포 원소에 대해), 그리고 긍정적이고자 하는(나쁘다! 라기보단 이래이래서 이럴 수도 있었겠다 하는) 저자의 시각이 느껴진다.
연의에서 역사에 없는 장면을 집어넣은 장면을 찾는 자체는 의미가 없다고 보지만. 굳이 역사를 왜곡해가며 어떤 부분을 첨가했다면 그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효과는 기대한 것 만큼 나왔는지 등등을 파헤치는 것은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그 기대가 충족될 것 같아서 좋고 일일이 찾아보려면 피곤할텐데 절대내공 아홉친구가 대신 해준다니 좋고 하필 내가 다시 삼국지를 읽고 있는 이 시기에 딴지에 이런 시리즈가 나온게 끔찍하게 즐겁다
장수는 장기말 같은 존재라고 보는데. 좁게 보면 將이라는 글자가 직접 붙는 사람들(주장, 부장, 비장, 아장 등등) 아니겠소. 넓게 보면 소위 모사라고 불리는 사람들까지 포함한, 즉 전투를 지휘하는 데에 이바지하는 모든 사람 아니겠는가. 동탁과 손권 이야기가 나왔는데. 동탁은 당연히 장수라고 보고(속셈이 어땠던지간에 천자가 있었고, 그 아래에서 나라를 위해 일하는 장수였으니) 손권은 황제가 되기 전까지만 장수라고 보는게 맞지 않을까.
최고의 장수의 덕목이라면 아무래도 충성심, 실행력, 응용력? 충성심이야 말할 것도 없고 실행력은 시키는대로 잘 하는거고 응용력은 자유롭게 맡겼을 떄 최상으로 해내는 것?ㅋㅋ 말이 조악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이 그래.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읽은 연의의 단편들 속에서 보자면 제갈량과 조운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육손, 조조, 가후, 관우, 장료, 주유, 전위, 사마의 들도 높게 친다. 조조를 최고의 장수로 치기엔 충성심이 걸린다 ㅋㅋ다른건 최곤데. 아 흥분해서 엄청 길게 썼네.
다음 편 엄청 기대한다 -
많은 분들이 조자룡을 이야기 하시는데 실제로 조자룡이 그렇게 빼어나게 뛰어난 장수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오호대장군이 생길 때도 조운은 다른 공보다 아두를 구했던 공으로 더 인정을 받았다고 하지요. 그래서 다른 장수 관우는 조운이 뽑힌 것을 보고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참고로 제갈량과 엮인 대부분의 귀신도 놀랄 기략이 사실이 아니거나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제갈량은 진수도 얘기했듯이 뛰어난 정치가였지만 뛰어난 전략가는 아니었다. 가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례로 진창성같은 경우는 제갈량이 정공법에 뛰어났지만 기략은 부족한 증거라고 보는 의견들도 많다고 합니다.








